1. 추석이면 더 선명해지는 그날의 손길
나는 1960년대, 논과 흙냄새가 배인 시골 초가에서 자랐다. 소작농의 딸로 태어나 학교 대신 어깨에 책임을 얹고 자란 어린 시절은 늘 배고픔과 싸우는 시간이었 다. 해거름이면 어머니는 허리를 굽혀 밭에서 돌아오셨고, 손끝에는 늘 흙이 묻어 있었다. 어머니의 손은 따뜻했지만, 말수는 적었다. 그 말없는 손끝이 오늘도 내 가슴을 저미게 한다.
2. 서울행, 그리고 공장생활의 날들
열여덟, 도시의 불빛은 약속처럼 빛났고 나는 집안의 짐을 덜기 위해 떠났다. 공장 기숙사 방 한 켠, 새벽 종소리와 기계음이 나의 하루를 쩍 갈라놓았다. 손이 갈려도, 눈가에 졸음이 내려도 나는 일을 했다. 한 달 월급을 쥐면 가장 먼저 어머니에게 보냈다. 기차역 플랫폼에서 내민 헌 보따리가 어머니에게 닿을 때, 어머니의 눈가에 맺힌 눈물은 내가 받는 가장 큰 위로였다.
3. 누락된 효도와 남은 약속
어머니의 빈자리는 모든 추석을 달아나게 했다. 차례상 앞에서 어머니의 빈자리만큼 커진 마음을 어찌 채울지 몰라 손끝이 떨렸다. 돈과 편안한 삶이 어머니의 얼굴을 되돌려줄 수 없다는 사실이 가장 먼저 다가왔다. 나는 후회와 미안함을 주머니 속 돌멩이처럼 안고 살았다. 하지만 그 무게가 나를 더 좋은 부모로 만들었다. 나는 내 아이들에게 어머니가 해주지 못한 따뜻한 품을 주려 더 부지런히 사랑했다.
4. 서울에서의 오늘과 계속되는 그리움
지금 나는 서울에서 안정된 삶을 살아간다. 자식들은 자리를 잡았고 손주들의 웃음소리는 집안을 채운다. 겉으로 보이는 행복은 분명하지만, 추석이 다가오면 초가집 마루와 장작 타는 냄새, 어머니가 쭈그리고 앉아 송편을 빚던 그 손길이 훅 하고 찾아온다. 번듯한 아파트 창밖으로 비치는 보름달 아래서도 그 손길은 더 크게 느껴진다.
5. 추석, 그리고 다시 다짐하는 마음
나는 이제 안다. 효도는 거창한 선물이 아니라 매일의 작은 관심과 시간이라는 것을. 그 소중함을 알게 된 뒤로 나는 더 자주 전화를 걸고, 손주들과 함께 어머니를 닮은 음식을 만들며 그분의 이름을 불러본다. 추석이면 평생 못다한 말을 하듯 사진첩을 열고 오래된 기차표를 꺼낸다. 그때의 나는 아직 어머니 손을 더 잡아드리지 못했지만, 지금의 나는 아이들에게 사랑을 남기려 애쓴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누군가의 딸, 혹은 누군가의 아들이라면 오늘 한 번 그 손을 떠올려보라. 바쁜 일상 속 작은 마음 하나가 누군가의 추억을 따뜻하게 만들고, 언젠가 남겨질 이야기의 가장 밝은 부분이 된다. 추석은 그런 날이다—잃어버린 것들을 기억으로 불러와, 다시 사랑을 새기는 날.
☆ 아시는분의 구술을 글로 표현하여 동시대를 살으셨던 분들과 공유하고자 싶어 올려봅니다.